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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 모용희전과 광개토비의 비교를 통해 복원한 서기 407년 사방포위합전

 진서 모용희전과 광개토비의 비교를 통해 복원한 서기 407년 사방포위합전 " 그 뒤 사냥하여 노는 것을 좋아하므로 희가 따라서, 북으로 백록산에 오르고 동으로 청령을 지나고 남으로 창해에 임하니 백성이 고단하고 사졸이 늑대와 이리에게 해를 입거나 얼어죽기에 이른 자가 오천여 인이었다. 其後好游田,熙從之,北登白鹿山,東過?嶺,南臨滄海,百姓苦之,士卒?豺狼所害及凍死者五千餘人矣。 마침 고구려가 연군을 침범하여 백여 인을 죽이고 약탈하였다.會高句驪寇燕郡,殺略百餘人。"_진서 모용희전  불멸의 이순신 와키자카 야스하루 목소리 나레이션 :  모용희가 사냥하여 노는걸 좋아했다하는데. 고대에 사냥이란 왕이 귀족 자제들을 데리고 하는 군사 훈련이었다. 모용희의 사냥은 "북으로 백록산에 오르고 동으로 청령을 지나고 남으로 창해에 임하니"란 사료 기록에서도 드러나듯 엄청난 장거리 사냥이었다. 장거리 행군에 지치지않고 여러 환경에 익숙하게하려는 모용희의 뛰어난 군사 훈련.... 그런데 뜻밖의 사태가 터진다. 사냥에 동원된 남자들이 늑대와 이리에게 해를 입거나 얼어죽어 그 수가 무려 5000여명에 달했다는 것이다. 과연 기마민족 모용선비의 대선우 모용희가 사냥을 계획하면서 늑대 이리 따위의 공격이나 추위에도 대비하지않았을까   더군다나 이 모용희의 사냥 관련 기사는 정확한 연도 표기도 되어있지않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을 보면 "마침 고구려가 연군燕郡을 침범하여 100여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란 기록이 그대로 뒤따른다. 이 연군은 [위서 지형지]를 보면 오늘날의 베이징에 있던 군현으로 당시 모용씨 정권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광개토가 베이징까지 비려족(=거란의 조상으로 또 다른 이름은 '선비')을 데리고 노략질을 해대자 개빡친 모용희가 사냥을 이려 이려 하고다니며 전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후 기습적으로 요동으로 쳐들어가려고했던듯한데. 광개토가 선수를 쳤다. 그게 광개토비에 나온다. "3면 4행 十七年丁未...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태왕 편(작성 중)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태왕 편  // 광개토왕(廣開土王) 고서보기 원년 05월 광개토왕이 즉위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원년 07월 백제의 10성을 빼앗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원년 09월 거란을 정벌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원년 10월 백제의 관미성을 빼앗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2년 08월 백제의 공격을 막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2년 08월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3년 07월 백제의 침공을 물리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3년 08월 나라 남쪽에 7개의 성을 쌓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4년 08월 패수에서 백제군을 격퇴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9년 01월 후연에 사신을 파견하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9년 02월 후연이 신성과 남소성을 빼앗다 고서보기 원문이미지 원본이미지 리스트 // 11년 후연의 숙군성을 공격하다 후연의 숙군성을 공격하다 ( 402년 (음) ) 十一年, 王遣兵攻宿軍, 燕平州刺史慕容歸, 弃校勘 019城走. 校勘 019 주자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棄로 되어 있다. 주제분류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색인어이름 : 慕容歸 지명 : 平州 국명 : 燕 글자 크게글자 작게 후연의 숙군성을 공격하다 ( 402년 (음) ) 11년(402) 왕이 군대를 보내 〔후연의〕 숙군성(宿軍城)註 001을 공격하니, 〔후〕연[燕]의 평주자사(平州刺史)註 002 모용귀(慕容歸)註 003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註 004 註 001 숙군성(宿軍城) :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이우뤼산[醫巫閭山] 동쪽의 북진(北鎭)으로 비정되는데(孙進己·王绵厚, 126쪽), 랴오허[遼河]의 서쪽에 해당한다. 후연 평주(平州)의 치소가 본래 랴오허 동쪽의 평곽(平郭; 蓋州)이었다는 점에서 이 기사는 402년 5월 이전에 후연이 평주의 치소를 숙군성으로 옮겼고(공석구, 64쪽), ...

국사편찬위원회가 정리한 광개토태왕의 정복 전쟁과 그의 일생

 광개토태왕폐하 광개토왕의 정복 전쟁 고구려의 천하가 열리다 미상 광개토왕의 정복 전쟁 대표 이미지 중국 길림 광개토왕릉비 정면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광개토왕(廣開土王)은 391년 고구려 19대 왕으로 즉위하여 412년 사망하기까지 무수히 많은 정복 전쟁을 수행하였다. 남쪽으로는 백제를 압박하며 경기도 북부를 비롯한 한강 이북지역을 장악하였으며, 북쪽으로는 거란과 숙신(읍루)을 정벌하였다. 또 동쪽으로는 동부여를 공격하여 복속시켰으며, 서쪽으로는 후연과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요동 반도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처럼 광개토왕은 고구려의 영역을 사방으로 확장하며 나라의 전성기를 열었던 군주로 평가된다. 이러한 광개토왕의 위업은 414년 그 아들 장수왕(長壽王)에 의해 건립된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2 고구려, 고난의 세월을 맞이하다 4세기에 접어들면서 고구려를 둘러싼 동아시아 국제 정세는 거세게 요동쳤다. 중원을 통일한 진(晉) 제국이 쇠퇴하면서 중국 각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던 북방민족들이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진 제국은 북방민족에 의해 낙양(311년)과 장안(316년)이 함락당하고 황제가 잡혀가 죽임을 당하며 멸망하기에 이른다. 317년 진 황실의 일족이었던 사마예(司馬睿)가 건강(建康, 지금의 난징)에서 동진(東晉)을 재건하였지만, 화북 지역은 다섯 계통의 북방종족이 건국한 여러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는 5호 16국의 대혼란기가 시작되었다. 한편, 이 무렵 고구려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점령하고(313~314) 동북아시아 세력의 한 축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왕은 왕 중의 왕 ‘태왕(太王)’으로 불리었으며, 고구려 세력권 내에는 말갈, 옥저, 동예 등 주변 세력뿐만 아니라 낙랑·대방 출신의 백성까지 흡수되어 있었다. 하지만 4세기 전반 서방으로부터 고구려의 발전을 가로막는 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당시 북방민족의 발호 속에 요서 지역에는 선비족(鮮卑族)의 일파인 모용부(慕容部, 모용선비) 세력...

광개토호태왕비 비문 전체

 광개토호태왕비 비문 전체  // ========== 1면 1행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天帝之子,  母河伯女郞, 部卵絳世, 生而有聖德, □□□□□命駕 옛날에 시조인 추모왕이 나라를 건립할 때에 그의 부친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여랑으로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다. 태어나자 곧 성덕이 있었다. 世 : 出로 읽음. 水谷悌二郞만 世로 봄 而 : 子(雙勾本) 德 : ?만 보임. 1면 2행 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浮龜”應聲卽爲(我連?浮龜;3행) 순행 남하하였다. 그는 남하하는 길에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었다. 왕은 나루에 이르러 말했다. “나는 황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다. 나를 위해 거북을 띄워 배로 삼고 갈대로 다리를 만들어라” 소리에 따라 즉시 거북과  갈대로 이루어진 다리가 나타났다. 幸 : 車 津 : 聿 1면 3행 連?浮龜, 然後造渡, 于 沸流谷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不迎王. 王于忽本東岡, 黃(龍負升天;4행) 연후에 강을 건넜다. 비류곡 홀본지방 서쪽의 산 위에 성을 쌓아 도읍을 삼았다. 세상의 왕위를 즐기지 않아 (하늘은) 황룡을 보내 왕을 영접하였다. 왕은 문득 홀본 동강에서 황룡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沸流 : 송양의 전설과 관계가? 黃 : 水谷悌二郞은 履로 봄. 負 : 水谷悌二郞은 首로 봄. 1면 4행 龍負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紹承基業.  遝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유명을 이어받은 세자 유류왕이 치국지도로 사업을 진흥시켜 국가가 大治되었다. 대주류왕은 양대의 기업을 계승하여 계속 발전했다.  이어 17세를 전하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다. 興 : 大 遝 : 윗부분에四자가 남아있음. 朴時亨은 遝(=及)으로 봄. 1면 5행 二九登祚, 號爲永樂太王. 恩澤洽于皇天, 威武桭被四海,  掃除不□, 庶...